베를린으로 온 예술가들, 뉴 베를리너 (1) 프롤로그
뉴욕, 파리, 런던의 높은 물가를 견디지 못한 아티스트들은 드넓은 공간, 대도시로서 상상할 수 없는 저렴한 물가의 베를린에 정착했다. 그리고 제2세대 베를리너, 베를린이 아닌 다른 도시 또는 나라 출신으로 경제적 해방, 정신적 여유를 찾아 베를린에 정착해 현재의 베를린을 이끌고 있는 이들은 신선하고 기발한 문화를 베를린 곳곳에서 생산해내고 있다. 는 아티스트 또는 크리에이터. 우리는 그들을 ‘뉴 베를리너’라고 부른다.
“도대체 왜 베를린이야?”
이왕 떠날 거면 이름만 떠올려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뉴욕, 파리, 런던으로 가야지 왜 베를린이냐며 많은 이들이 궁금해했다. 우리가 떠올리는 베를린은 아직도 무겁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히틀러의 본부, 동·서독 분단 역사의 중심,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함께 허물어진 건물, 험상궂은 그라피티, 스킨헤드족의 출현. 우리와 비슷한 역사적 상황 때문인지 과거 보고 들은 베를린의 모습은 대게 이런 것들이었다. 여행자들이 원하는 유럽의 낭만과는 영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베를린은 허물어진 건물 안, 험상궂은 그라피티의 뒷벽을 통해 ‘세계에서 가장 크리에이티브 한 도시’로 성장했다. 1970년대 뉴욕의 소호처럼 구동독 지역의 버려진 공장 안에 예술가들의 아틀리에가 꾸려지고, 텅 비어 있는 동독 관청 건물에는 갤러리며 바, 클럽 등이 들어섰다. 이러한 공간을 찾아 세계에서 아티스트들이 몰려들었고, 통일 수도로서 새로운 이미지를 찾던 베를린 시는 그들에게 기꺼이 베를린을 내어주었다. 그래서 철조망에 싸여 있던 칙칙한 회색 도시는 ‘예술’ ‘자유’ ‘창조’ 같은 역동적인 색깔을 입게 되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베를린의 분위기는 무척 인터내셔널 하다. 베를린은 독일은 물론이고 유럽의 다른 어떤 도시보다도 외국인에 대한 거부감이 적다. 베를린의 중심 지역인 미테 거리 한복판을 걷는 10분 동안 최소 다섯 개 언어를 들을 수 있다. 카페나 바에 가면 어렵지 않게 새로운 이들과 어울릴 수 있다. 대부분 자신을 아티스트라고 소개하고 영어로 이야기하며 페이스북 주소를 교환한다. 이는 유럽을 대표하는 예술 도시이자 국제도시인 파리, 런던과는 또 다른 분위기다. 이미 잘 다듬어진 파리와 런던과 달리 가난한 예술가들이 점령하고 있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뉴욕, 파리, 런던의 높은 물가를 견디지 못한 아티스트들은 드넓은 공간, 대도시로서 상상할 수 없는 저렴한 물가의 베를린에 정착했다. 그리고 이들은 젊고 신선하고 기발한 문화를 베를린 곳곳에서 만들어내고 있다.
“과거 노동자 계층의 도시였던 베를린에는 별다른 문화가 없었어요. 그런데 베를린에 아티스트들이 모이면서 카페와 바가 생기고 다양한 문화 공간이 열리면서 베를린 문화가 형성된 거죠. 지금의 베를린 문화는 리얼 베를리너가 아닌 외부의 정착민, 즉 제2세대 베를리너가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독일 남부 출신 광고 기획자인 마리오가 설명했다.
제2세대 베를리너. 베를린이 아닌 다른 도시 또는 나라 출신으로 경제적 해방, 정신적 자유를 찾아 베를린에 정착해 현재의 베를린을 만들어낸 아티스트 또는 크리에이터. 나는 이들을 ‘뉴 베를리너’라고 칭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베를린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베를린 중에서도 뉴 베를리너가 선택한 다섯 지역, 미테Mitte, 프렌츨라우어베르크Prenzlauerberg, 크로이츠베르크Kreuzberg, 노이쾰른 Neukoelln, 프리드리히스하인Friedrichshain으로 향해 각기 다른 라이프스타일과 아지트를 둘러볼 참이다.
뉴 베를리너의 안내가 시작되기 전,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어쩌면 그들처럼 내 삶의 다음 도시가 될 수도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