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를 펼치고 토스카나 대표 도시로 꼽히는 피렌체와 피사, 시에나 위에 ‘X’표를 그려 넣었다. 그 후로 7박 8일 동안 내내 시골길을 달렸다. 찬란한 역사가 숨 쉬는 절벽 위 고대 도시와 끝없이 펼쳐진 초록빛 구릉 사이. 토스카나의 산해진미는 그 곳에 있었다.
나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성공에 찬성할 수 없었다. 이 책은 미국의 저널리스트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자전적 여행 에세이다. 안정적인 삶을 꾸리던 작가가 어느 날 갑자 기 ‘신내림’을 받아 ‘운명적 이혼’을 거행하고 ‘진정한 삶’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는 내용이다. 그녀에게는 미안하지만 로마에서 아쉬람 그리고 발리에 이르는 그녀의 여정을 좇고 싶은 마음은 좀처럼 샘솟지 않았다. ‘자아 찾기의 과정’이라며 늘어놓은 지극히 개인적인 푸념에 맞장구를 치기는 더욱 싫었다. 그러나 단 한 부분에서는 그녀와 한마음이 되어 신명나게 즐길 수 있었다. 바로 ‘이탈리아 음식’을 향한 찬미였다.
이 마음은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를 볼 때 더 극적인 효과를 발휘했다. 상큼한 레몬을 곁들인 바삭한 아티초크 튀김, 고릿한 리코타 치즈가 스르르 녹아 들어간 가지 요리, 멜론의 부드러운 속살 위에 새빨간 생살을 드러낸 프로슈토, 그리고 줄리아 로버츠의 커다란 입을 촉촉히 적시며 돌돌 말려 들어가는 링귀~니, 파파르데~엘레, 스파 게에~티! 아, 먹음직스러울 뿐만 아니라 섹시하기까지 한 이탈리아 음식들의 향연이 길어지는 바람에 나는 입을 틀어막아야만 했다. 야릇한 탄성이 극장을 울리는 상황만은 피해야 하지 않겠는가.
‘미식’을 테마로 기획된 9월호 특집 여행지로 이탈리아가 낙점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이탈리아가 세계 최고의 미식 국가라는 데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물론 “프랑스!”라고 외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남녀노소, 빈부격차, 대륙과 문화의 차를 막론하고 세계의 식탁을 점령한 진정한 승자는 누가 뭐래도 이탈리아다. 100만원을 호가하는 미슐랭 3 스타의 정찬은 물론이고 뒷골목 바르Bar에서 갓 구운 2유로짜리 피자 한 조각에도 행복해진다. 뉴욕, 베를린, 도쿄 등의 다른 나라 대표 도시를 가도 마찬가지다. 정작 그 도시의 식문화가 버거울 때 기댈 수 있는 곳은 이탈리아 음식이다.
그래서인지 이탈리아인들의 음식 자랑은 대단하다. 하긴, 이탈리아 음식의 기본이라 불리는 파스타만 해도 재료에 따라 150여 가지, 면의 형태에 따라 600여 가지로 나뉜다니 그럴 만도 하다. 이탈리아인들과는 음식에 관한 이야기로 너끈히 하루를 보낼 수 있다. 그래서 이번 여행 중 만난 사람들과 ‘최고의 만찬’에 대한 미식 토크를 시도했다. 그런데 그 내용은 일반적인 예와 사뭇 달랐다. 예를 들면 이랬다. “얼마 전 삼촌이 직접 짠 올리브 오일을 보내줬는데 향이 제법 그럴싸 해. 정원에 심은 토마토가 달아서 파스타를 해 먹어야겠어. 생면과 페코리노 치즈는 건너 편 조르지오네 농장 것이 최고야. 와인은 살바토레가 담근 로컬 품종의 레드 와인을 곁들일 거야.”
요란한 손동작을 섞어 재료와 맛에 대한 화려한 수식어를 열정적으로 늘어놓는 사람들. 이들은 북부 에밀리아 지방의 특1급 생면에 최고급 인증인 DOP에 빛나는 시칠리아산 올리브 오일, 이탈리아 3대 명품 와인인 피에몬테의 바롤로 등 명성과 브랜드를 앞세워 콧대를 세우지 않았다. 텃밭과 정원에서 난 채소의 맛과 향, 이웃의 한 해 농사 과정이 고스란히 담긴 와인이 그들의 자랑이었다. 산지미냐노에서 만난 가이드 사라가 말했다. “그럴 필요가 없어요. 기후와 환경이 워낙 좋아 어디에서나 곡식이며 과일이 무럭무럭 자라고 건강한 가축이 살을 찌우죠. 대부분의 도시나 마을에서 자급자족이 가능한데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음식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하거든요.”
이런 자부심을 엿보고 싶어 향한 곳은 토스카나 주다. 토스카나 주는 총면적 2만 2993제곱킬로미터로, 이탈리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지리적 위치뿐만 아니라 역사와 문화 또한 오랫동안 이탈리아의 심장 자리를 지켜왔다. 로마인보다도 앞서 이탈리아에 문명을 싹 틔운 고대 에트루리아인의 발상지였을 뿐 아니라, 15세기 찬란한 르네상스의 고향이었다. 갈릴레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등 르네상스의 거장들을 키워낸 피렌체 의 메디치 가家, 이탈리아의 전설적 오페라 작곡가 푸치니, 현존하는 최고의 테너 안드레아 보첼리 등이 토스카나의 영광을 대변한다.
이렇게 찬란한 역사와 함께 ‘화려한 음식 문화’ 또한 기대한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식문화 탐방기인 <왜 이탈리아 사람들은 음식 이야기를 좋아할까>를 통해 미리 엿본 토스카나의 음식은 애초의 예상에서 크게 빗나가 있었다. 토스카나의 음식은 무례할 정도로 소박하고 단순하며 간결한 것이 특징이라는 것이다. 그 대신 주재료의 품질을 대하는 태도와 요리 방식은 이탈리아 다른 어떤 지역보다 엄격하단다. 토스카나 주 의 대표요리라고 하는 비스테카 알라 피오렌티나(피렌체식 티본 스테이크)를 예를 들어 보자. 토스카나인들은 장작불에 굽는 요리를 좋아하는데, 이때 소금은 물론 그 어떤 조미료도 첨가하지 않고 굽는다. 이게 어떻게 요리냐고? 대신 최상급 고기와 부위를 고르는 것, 그리고 장작의 향과 불꽃의 세기를 고려해 최적의 장작을 찾아내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19세기 프랑스의 소설가 스탕달은 토스카나를 여행한 후 이런 말을 남겼다. “토스카나의 농부들은 특별하다. 이 시골 사람들은 유럽에서 기품 있는 사회를 구성한다. 나는 도시 사람들보다 그들을 더 좋아한다.”
그래서 나는 토스카나 주를 대표하는 피렌체, 피사, 시에나와 같은 대표 도시를 일정에서 과감하게 삭제했다. 대신 아슬아슬한 아펜니노 산맥과 그 아래 끝도 없이 펼쳐진 초록빛 구릉사이에숨겨진 고대 도시, 이름도 처음 들어 본 시골 마을의 농장을 찾았다. 들르는 곳마다 오가닉 농장을 운영하는 농부, 고대 에트루리아인의 전통 방식을 그대로 따르는 와인 생산자, 건강한 페코리노 치즈를 먹고 자란 목장의 삼대손, ‘엄마의 레시피’로 미슐랭 스타를 받은 미모의 셰프 등 하나같이 멋진 사람들을 만났다. 이들과 함께 하는 내내 풍요로운 토스카나의 향기가 코끝을 맴돌았고, 소박한 시골의 맛이 혀와 위장에 편안히 안착했다. 피렌체에서 예술 작품을 본 후 심장이 쿵쾅대고 정신이 몽롱해지는 경험을 했다는 프랑스 작가 스탕달. 토스카나의 산해진미를 통해 스탕달의 기분을 알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