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1989년 11월 9일. 베를린을 동과 서로 갈라놓았던 두터운 장벽이 허물어졌다. 베를린 장벽은 독일 분단 만이 아닌 동서 냉전체제의 상징이었다. 즉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냉전체제의 종식을 불러일으키며 20세기 후반 세계사에 큰 변혁을 몰고 온 사건인 것이다. 베를린은 5년마다 이를 대대적으로 기념하며 풍성한 행사를 준비한다. 사찰 음식의 대가 정관 스님의 ‘화합의 만찬(한 그릇 안에 담긴 우주/Das Universum in einer Schale)’또한 그중 하나다.
11월 8일, 과거 베를린 장벽이 드리워져있던 포츠다머 플라츠의 성 마테우스 교회에서 정관 스님의 ‘화합의 만찬’이 열렸다. 본 행사는 지난 5월 개장한 예술 정원 프로젝트 <제 3의 자연>의 연계 행사다. 한반도 남북의 꽃으로 백두대간을 재현한 예술 정원 <제 3의 자연>은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을 맞아 기획된 공공예술 프로젝트다. 금아트프로젝트, 현대 미술과 생태학적 결합을 고민해 온 한석현, 김승회 작가는 정원을 통해 자연 속에서 사라지는 경계를 이야기한다. 정원이 개장한 5월 23일부터 11월 15일까지 ‘경계’ ‘화합’ ‘유토피아’를 테마로 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해왔다. 한식 문화 창작 콜렉티브 크레잇터스(crEATors)가 함께 주최한 ‘화합의 만찬’은 그중 하이라이트로 손꼽힌다.
한국에서 온 스님이 독일의 기독교 교회에 한국에서 차린 만찬이라니! 이 파격적인 행사의 호스트로 나선 정관 스님은 전라남도 백양사 천진암 주지다. 그는 2015년 미국의 뉴욕타임즈를 통해 세계에 알려졌으며 ‘세계에서 가장 고귀한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라는 극찬에 힘입어 2017년엔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 <셰프의 테이블 시즌 3>에 출연했다. 그 후 정관 스님과 한국의 사찰 음식은 전세계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사찰 음식이 품은 ‘비건’ ‘식물 기반(Plant-based) 식사’ ‘발효 음식’ 등은 현재 전세계가 주목하는 식문화 키워드다. 독일 미디어 또한 정관 스님에 대한 관심이 높다. 독일 유력 일간지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은 정관 스님의 요리법을 ‘미래의 음식’으로 집중 소개했다.
“종교도, 정치도, 이념도, 문화도 ‘음식’통해 벽을 허물고 화합할 수 있습니다.”
먼 길을 떠나 이번 행사에 참여하게 된 소회를 밝힌 정관 스님. 그는 남북의 자연을 한 그릇에서 음미할 수 있는 메뉴를 준비했다. 금강산 산더덕, 천진암 인근에서 채취한 탱자와 산초, 복분자 등 특별한 식재료를 베를린으로 공수해 유럽식 정찬과 불가의 식사예법이자 수행의 과정인 ‘발우공양’을 통해 선보였다. 이를 맛보기 위해 베를린의 아티스트, 예술 애호가를 비롯해 스타 셰프, 미식 업계 인사, 한식 팬까지 40여명의 다양한 참가자들이 모여들었다. 4가지 종류의 전식과 밥, 국, 7개 반찬으로 구성된 발우공양 한 상, 넷플릭스에 소개된 연꽃차 및 후식이 차례대로 테이블 위에 올려 졌고 곳곳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화합의 만찬은 베를린 프렌츨라우어베르크 북부 지역 기독교 연합회의 알무트 벨만 목사와 정관 스님이 기독교와 불교의 제례를 혼합한 양식으로 함께 진행됐다. 벨만 목사가 속한 프렌츨라우어베르크 북부 지역 기독교 연합회는 통일 전 동독의 평화 시민 혁명을 지원한 단체로 더욱 의미가 깊다. 또한 성 마테우스 교회에는 옛 동독 출신의 아티스트 노르베르트 비스키(Norbert Bisky)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었다. 한국에도 여러번 소개된 적있는 작가로 베를린 장벽 붕괴 전후의 역사와 기억을 담은 작품세계로 주목받았다.
한국과 독일의 역사와 종교, 예술, 문화가 평화롭게 공존했던 화합의 만찬. 행사가 끝나고 발길을 돌리지 못한 게스트들은 화합의 만찬이 마음 깊숙이 남긴 여운을 오래오래 음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