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까지 베를린은 굵직굵직한 행사로 북적댔다. 제70회를 맞은 베를린국제영화제는 물론 독일의 스타 셰프와 미식가들이 한데 모인 음식 축제 ‘잇! 베를린’이 열렸기 때문이다.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는 1년 내내 다채로운 음식 행사가 열린다. 그중 ‘잇! 베를린(Eat! Berlin)’은 파인다이닝 러버들을 위한 수준 높은 미식 행사다. 팀 라우에(Tim Raue)를 비롯해 루츠(Rutz), 노벨하르트 & 슈무치히(Nobelhart & Schmutzig) 등 ‘잇! 베를린’에 참여한 레스토랑이나 셰프들은 대부분 미쉐린 가이드에 이름을 올렸거나 고미요(Gault & Millau) 가이드에서 후한 점수를 받았다. 베를린의 미식 행사답게 독특한 테마나 컨셉의 이벤트도 인상적이다. ‘범죄 소설 낭독과 5코스 채식 메뉴’, ‘두 편의 영화 관람과 3코스 런치’, ‘중국의 사진가 렌항의 작품을 배경으로 즐기는 5코스 시너지 메뉴’ 등 문화와 예술을 접목한 정찬도 마련됐다.
2월 20일부터 3월 1일까지 무려 72개 행사가 열린 ‘잇! 베를린’. 놀랍게도 그중 가장 큰 인기를 모은 것은 정관 스님과 레스토랑 고추가루(Kochu Karu)의 ‘사찰 음식’ 행사였다.
“이번 행사에서 가장 구하기 어려운 티켓을 거머쥔 행운의 주인공들을 환영합니다!” ‘잇! 베를린’ 페스티벌의 대표 베른하르트 모저가 일부러 들러 인사말을 전했다.
‘사찰 음식의 대가’ 정관 스님의 명성은 베를린 미식가들 사이에서도 대단하다. 백양사 천진암 주지 정관 스님이 베를린을 찾은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7년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 <셰프의 테이블> 시즌 3의 주인공으로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초청되었고, 같은 시리즈에 출연한 베를린의 스타 셰프 팀 라우에와 함께 레드 카펫을 밟았다. 지난해 11월엔 사찰 음식을 통해 종교와 이념, 문화의 화합을 기원한 행사 ‘화합의 만찬’의 호스트로 나섰다. 독일의 유력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AZ)>은 정관 스님의 음식을 “성찰을 통한 미래의 요리”라고 소개했다.
이번 행사에서 정관 스님과 함께 사찰 음식을 선보인 파트너는 퓨전 한식 레스토랑 ‘고추가루’다. 고추가루는 오페라 가수 출신 한국인 이빈과 스페인 출신의 셰프 호세 미란다 모리요(José Miranda Morillo)가 운영하는 식당이다. 한식을 스페인식 타파스로 재해석한 창조적인 요리로 소문난 곳이다. 베를린에서 한식 혹은 한식을 기본으로 한 레스토랑 중 유일하게 미쉐린 빕 구르망을 받았으며, 고미요 평점 15점을 보유하고 있다.
두 사람의 인연은 201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호세 셰프가 정관 스님을 세계에 알린 <뉴욕 타임스>의 기사를 보고 이빈과 함께 백양사를 찾아갔다. 그 후로 스승과 제자가 되어 정관 스님의 사찰 음식 레시피를 응용한 메뉴를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4년 후 ‘잇! 베를린’에서 스승과 제자의 콜라보레이션 디너를 선보였다.
2월 25일과 26일, ‘사찰 음식’은 총 7개 코스 메뉴로 진행됐다. 그중 두 가지는 정관 스님의 요리, 세 가지는 호세 셰프의 요리, 나머지 두 가지는 콜라보레이션 요리로 구성됐다. 음식은 로컬 식재료를 기본으로 하되 장과 말린 나물 등 독일에서 구할 수 없는 한국의 식재료, 천진암에서 만든 김치와 부각, 장아찌 등은 한국에서 공수했다. 한국과 스페인, 독일의 국경을 넘나드는 접시가 테이블에 놓일 때마다 게스트들의 눈이 반짝였다. 3년간 간장에 묵힌 연근, 1년간 숙성시킨 김치, 바삭하고 고소한 김부각과 감자부각, 달콤하고 쫄깃한 감말랭이무침. 쉽게 맛볼 수 없는 식재료인데다 현대적 감각까지 더한 음식은 감탄을 자아냈다. 하이라이트는 ‘발우공양’이었다. 스님들이 사용하는 식기인 발우에 밥과 된장국, 김치와 세 가지 반찬을 담은 한상 차림에 뜨거운 반응이 쏟아졌다. 정관 스님의 사찰 음식은 오신채(불교에서 금하는 다섯 가지 음식으로 파, 마늘, 달래, 부추, 무릇)를 쓰지 않고도 깊은 맛이 우러나온다. 와, 어떻게?
그 비법은 한국 음식의 근간인 ‘발효 음식’에 있다. 장과 김치는 물론 장아찌, 말린 나물 모두 세월과 정성을 오롯이 담은 발효 음식으로 그 맛이 깊을 수밖에 없다. 흥미로운 사실은 사찰 음식이 전 세계 음식 트렌드와 궤를 함께한다는 것. ‘지역과 계절’의 식재료를 이용한 ‘자연 음식’으로 건강에 좋은 ‘발효 음식’을 포함하며 지구 환경에 고마움을 기리는 ‘지속 가능한 음식’이자 ‘힐링 푸드’가 아닌가. 또 맛은 물론 사찰음식에 담긴 이야기까지 아낌없이 펼쳐낸 정관스님의 열정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행사에 참여했던 한 푸드라이터는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넘어 혀끝에서부터 마음까지 통할 수 있었던 시간’이라고 평했다.
정관 스님과 고추가루의 사찰 음식 디너는 ‘잇! 베를린’ 행사 마지막 날 열린 시상식에서 대중들이 꼽은 최고상을 받았다. 새로운 한류의 키워드로 떠오르는 사찰음식을 세계 곳곳에서 만나게 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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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gue Korea Digital 2020 March
Writer & Photographer | Dahee Seo
Editor | Sohyun 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