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1일 확진자 2만여 명을 웃도는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 살고 있다. 코로나 하루 확진자를 부러 확인하지 않은 지 꽤 됐다. 어차피 밖에 나가지 않을 테니까.
12월 13일. 독일 메르켈 총리는 12월 16일부터 1월 10일까지 ‘하드 록다운’을 선언했다. 독일은 11월부터 라이트 록다운에 돌입했다. 레스토랑과 카페, 바, 클럽 등은 음식과 음료 배달 및 포장 서비스로만 운영이 가능하고 극장과 오페라하우스, 콘서트홀, 체육관과 피트니스 스튜디오, 수영장, 사우나와 스파, 뷰티 숍 등은 문을 닫았다. 하지만 백화점이나 쇼핑몰, 일반 상점은 문을 열었다. 연말 ‘만남의 장소’가 되는 크리스마스 마켓은 취소됐지만 소규모 벼룩시장은 여전히 개장했고, 거리의 레스토랑과 바는 글뤼바인, 와플을 팔았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하루 사망자가 590명에 이르던 지난 9일 메르켈 총리는 두 손 모아 간절히 호소했다. 그리고 지난 주말 긴급 회동 후 하드 록다운 결정을 내렸다. 이제 슈퍼마켓이나 약국, 은행 등 필수 업종을 제외한 모든 상점은 1월 10일까지 영업이 중지되며 학교와 유치원도 문을 닫는다. 최대 두 가구, 다섯 명까지만 모일 수 있는, 최대 명절인 크리스마스 연휴 기간엔 잠시 완화되지만 연말 및 신년맞이인 ‘질베스터’엔 독일 전역에 집회가 금지된다.
“아, 내 아이폰!” 이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불운의 뽑기로 당첨된 불량 폰, 아이폰 12 미니다. 당장 휴대전화를 들고 뛰쳐나갔다. 역시 쇼핑몰과 상점, 우체국 앞에 긴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이틀 만에 크리스마스 준비를 마쳐야 하니까! 하드 록다운으로 인해 북적대는 거리 풍경에 한 달 전 라이트 록다운을 앞두고 마지막 외식을 즐기고자 레스토랑과 카페, 바로 몰려든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국에서 ‘쯧쯧’ 하며 혀를 차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많은 이가 “선진국으로 여기던 미국과 유럽 국가의 민낯을 봤다”고 말한다. 실제로 ‘코로나19로부터 가장 안전한 나라 1위’라는 독일의 팬데믹 초반 방역과 사회 분위기는 꽤 충격적이었다. 고열과 호흡곤란이 오기 전까진 받을 수 없는 코로나 테스트, 느리고 낙후된 의료 시스템, 마스크 착용 거부, 생필품 사재기에, 가치관의 차이와 인종차별 문제까지 그동안 숨어 있거나 외면해온 본모습과 문제점이 툭툭 튀어나왔다. 이에 실망한 많은 한국인, 특히 건강과 의료 문제에 민감한 이들은 짐을 싸서 떠났다. 떠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집은 물론이고 통신사, 보험 등 웬만한 일은 계약을 해지하는 데 최소 3개월 정도 걸리니까.
하지만 곧 독일의 저력을 깨닫는 기회도 마주했다. 국내 미디어도 화제로 다룬 ‘묻지도 따지지도 않은 긴급 지원금’을 통해서다. 간단한 온라인 신청만으로 기업은 물론이고 자영업자, 소상공인, 프리랜서 등에게 최소 5,000유로라는 금액을 즉각 지원했다. 마냥 부러워할 일은 아니다. 이곳에선 평균 수입의 40%가 넘는 세금을 낸다. 그렇게 차곡차곡 모은 세금은 국민을 위한 복지에 쓰이는데, 이번에 제대로 빛을 발한 거다. 이렇게 당겨 쓴 예산은 앞으로 많은 세금을 내며 메울 예정이고. 라이트 록다운으로 문을 닫았거나 경제적 도움이 필요한 업장은 지난해 기준 최대 75%의 수익을 지원받을 것이라고 한다. 이번엔 세무사를 통해 꼼꼼하게 묻고 따진 후 지급한단다. 또 메르켈 총리는 예술가와 창조적 활동 유지를 위한 지원을 촉구하며 “문화를 통한 삶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많은 예산을 투입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하드 록다운 발표에도 잊지 않고 덧붙였다. 이번 록다운 조치로 피해를 보는 사업체에 월 최대 50만 유로까지 지원하겠다고.
그러니 일단 위험한 거리를 떠나 평온한 집 안에 머무르면 된다. 밖엔 얼마 전 여행을 다녀온 사람도, 몰래 프라이빗 파티를 한 사람도, 마스크를 여전히 거부하는 사람, 심지어 코로나 팬데믹을 음모론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여행의 자유화를 외치다 통일을 이룬 나라, 나치와 공산주의 정권의 감시와 통제에 맞서 자유를 쟁취한 나라다. 또 다양한 민족이 여러 문화로 어우러져 살고 있다. 한국인으로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수두룩하지만, 적어도 독일 정부가 최선을 다할 거란 믿음, 내 몸은 내가 지킨다는 의지만 있다면 코로나 시대의 타향살이가 그렇게 두렵진 않다.
아, 코로나 팬데믹 이후 좋아진 점도 있다. 그토록 아날로그적이었던 독일의 디지털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으니까. 온라인 쇼핑과 배달 서비스를 비롯해 핀테크, 헬스케어 등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새로운 상품과 시스템이 등장하고 있다. 하드 록다운에 대비해 함께 사는 독일인 친구는 ‘이지쿡아시아’의 밀 키트를, 나는 홈 오피스를 아늑하게 만들 예쁜 조명을 주문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오후 4시면 찾아오는 칠흑 같은 어둠, 긴긴 겨울밤을 보내려면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겠다.